AAPG 학회 참석기

출발 당일 무엇을 가져갈지 몰라 (슈트케이스 하나 없이 필드나가듯이) 간단한 배낭에 옷가지와 발표용 랩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김해 공항에서 마지막 배웅을 해준 여자 친구(현재 아내)의 힘을 입고 출발은 당당했다.

그런데, 김포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데, 델타 항공의 외국인 아줌마 스튜어디어스들이 들어가는 이색적인 광경을 보았다. (당시 국내 항공사가 아가씨 승무원으로 승부를 걸고 있었던 터라.)

비행기에 타면서 부터 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외국 국적기인데다 영어로만 이야기해야 하고 그나마 한국계 승무원이 있었는데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기내식, 음료수 모두 잘 못 알아듣겠고 옆에 사람이 시키는 것을 먹었다. 콜라를 코크라고 부른다는 걸 그때야 알았을 정도. 그 뒤로 미국 국내선을 탈때는 ‘코크’만 시켜 먹었다.

12시간을 비행하고 처음 내린 미국 땅은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 작은 소도시지만 당시에 델타 항공의 허브 공항이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OSCON 참석차 얼마전 가 봤을 때는 작다고 느꼈다.)

간단한 영어로 입국 심사를 통과한뒤 댈러스로 가는 비행편을 찾아 보딩 패스를 받고 기다리면서 들리는 모든 말소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음처럼 들리는 게 마침내 내가 외국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대륙에 문화적 충격 받아
댈러스행 비행기를 타고 미국 대륙 평원을 지나면서 충격을 받았다. 정말 끝도 없이 넓고 넓은 땅에 삼각, 사각, 원형 도형이 보였는데 그게 옥수수 밭인지 꿈에도 몰랐다.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 이름을 이야기 하고 밴이 타고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데 해가 지는 지평선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톨게이트에서 돈을 받는 사람이 ‘백인’이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나는 미국 백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줄을 상상도 못했던 터이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 왔는데, 말이 잘 안통하니 지배인이 손짓 몸짓으로 부페니까 먹으면 된다 여기 (휙 불면 날아가는 베트남) 쌀도 있다고 먹으라고 했다. 일단 요기를 하고 계산서를 받았는데 여기서 또 한번 실수를 했다. 그때 저녁 식사가 대략 7불 정도 했는데, 가격을 말해 주고 룸넘버와 뭔가를 적으라고 하는게 아닌가.

지금이라면 팁을 적는 거라고 알았겠지만 그땐 식사 가격을 적는 줄 알았다. 그래서 7불을 그대로 적었는데, 즉 식사 가격만큼 팁을 준 것이다. 내가 나갈때 그 지배인의 과도한 친절함이란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아침에 일어나니 학회 장소로 가는 버스가 호텔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고 옆 자리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한 회사원이랑 이야기 했는데 같은 동양계이고 짧은 영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학회 중에도 지나가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동양계 사람들이 얼굴을 비슷하다는 이유로 목례를 하기도…

학회 장소로 온 나는 또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코엑스 전시장 보다 서너배는 큰 규모의 박람회장은 하루에는 다 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90년대 중반 미국 석유 지질학계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학교 뿐만 아니라 많은 석유 회사들이 자금을 충분히 투여하고 있었다.) 수 많은 지질학, 지질공항, 탐사 및 GIS 업체들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매일 140여개의 구두 발표와 백여개의 포스터 발표가 3일간 이루어졌다. 합쳐서 700개가 넘는 수준이다. 가히 엄청난 학회였다. 전 세계 지구과학계의 돈이 총집합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학회, 다양한 생각들
포스터 발표는 세번째 날이고 오전과 오후 각각 한 시간씩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다들 커다란 종이에 멋진 결과물을 포스터로 만들어 왔는데 나는 달랑 제목과 랩탑만 들고 왔으니 너무 초라했다. 그래서 전날 박람회장에 있던 한 그래픽 업체에 부탁해서 PT 파일을 컬러로 인쇄를 해서 나눠 주고, 방문한 사람들에게 주로 데모를 보여 주었더니 나름 반응이 좋았다.

우리 세션에서는 NOAA, USGS 등 유수 연구 기관 사람들이 발표를 했는데 주로 반 정도는 CD-ROM 애플리케이션을 나머지는 인터넷을 이용해 지질 정보를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내 논문 제목은 The Construction of the Internet Geological Data System Using WWW+Java(TM)+DB Technique, Tertiary Deposits of Korea이고 아래 PT는 1997년에 내가 만든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점심 시간에 또 한번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하나 먹으려고 “Would you give me a sandwitch?”라고 물었는데 계속 “What”을 연발하는 것이다. 몇 번이나 ‘샌드위치’를 외치고 물건을 가르키자 점원은 그저세야 “아하 새너(위)치”라고 하는 게 아닌가. ‘드’발음은 거의 안나는 거다.

그렇게 또 힘들게 밥을 먹고 포스터 부스로 오니 한화(당시 석유 사업을 하고 있었음)에서 오신 분이 명함을 두고 가셨다. 아마 한국 사람이라 반가웠던 모양.

발표를 마치고 호텔로 걸어 다운타운을 거쳐 오는 길에 맥도날드를 들렀다. 남부라서 그런지 맥도날드에 거의 90%가 흑인이었다. 약간 겁을 먹고 시켰는데 한국가 완전 다른 크기의 햄버거와 콜라에 또 한번 놀랐다. 솔직히 앉아서 다 먹지 못하고 남겨서 저녁까지 먹을 정도였다.

학회 마지막날에는 필드 트립이나 이벤트가 있는데, 신청을 늦게 해서 필드 트립 정원이 차버리는 바람에 미서부 스타일의 파티에 참가하게 되었다. 목장 같은 데 도착해서 입구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받아들고 안에 들어가니 컨츄리 풍의 바이얼린 연주와 바베큐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TV에서만 보던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보니 이 또한 새로운 재미였다.

짧은 영어로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그들은 동양에서 온 젋은 아시아인에 대해 매우 호기심 있게 친절을 보였다, 나중에 안 거지만 내가 아시아계라 특별 대우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는… 어쨌든 공연도 보고 고기도 먹고 나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학회를 마치고 당시 댈러스에 본사가 있었던 오디오넷이라는 회사를 찾았다. 마침 회사에서 인터넷 음악 관련 서비스를 준비 중이였기도 했고 그들의 사업 모델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역사상 최대 M&A의 주인공인 broadcast.com의 전신이기도 했던 이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블로그 가장 첫번째 글에 언급되어 있다.

이 학회를 통해 한국에서 연구하려던 ‘지질학과 컴퓨터의 접목’이라는 분야가 세계적인 추세임을 알게 되었고 어렵더라도 한번 해보고자 마음 먹었다. 거의 모든 세션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분석을 하는 작업을 하고 이를 비주얼하게 표시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들도 많았다. 전통 지질학의 틀에 갖혀있는 학교에서 새로운 연구를 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가슴의 새로운 꿈을 가지고 편안하게 WWW6 컨퍼런스가 열리는 샌프란시스코로 편안한 마음으로 길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