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해외 여행기(1997)

인생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계기를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석사 1년차에 다녀왔던 첫 해외 여행으로 미국 방문을 꼽을 것이다.

정말 세계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온전히 혼자만의 몸으로 직접 부딪히면서 다녀온 학회 발표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와서도 젊은 후배들이나 동료들에게 늘 해외 컨퍼런스를 가보라고 말한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연구한 주제를 학회에 발표해 보는 시도를 해보라고. 그게 아니라도 꼭 한번 큰 규모의 컨퍼런스를 둘러보고 올 것을 권장한다.

1997년 한창 대학을 막 졸업하고 대학원 시절 첫 미국 여행기의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고자 한다.

프롤로그

나의 학부 전공은 놀랍게도 지질학이다. 지질학 강박증에서 보다시피 어감도 이상하고, 일반인에게는 지리학이나 고고학과 차이가 뭔지 모르는 분야이다.

고교때 지구과학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이미 고2때 부터 전공을 정해 놓고 바닷가에 있고 당시 공룡으로 유명하시던 교수님이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학교를 선택했었다.

선배들과 야외 조사도 많이 다니고 즐겁게 전공 공부를 해오면서 학부 3학년 때 처음 인터넷을 접하고 여기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전공과 컴퓨터를 연계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랩에서 맥클래식으로 지질도와 도표를 그리던 일이 흔했다.

서퍼(Surfer)같은 소프트웨어로 지형도를 그려 시추 위치를 시뮬레이션 할 때 컴퓨터 작업은 필수가 되었다. 특히, 야외 전기 탐사 아르바이트를 갔을 때 여러가지 소프트웨어로 자료를 얻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 학과는 꽤나 전통적인 학풍이 흐르던 곳이었다. 지구물리나 지구화학 연구실은 주로 실내 실험을 통해 결과를 논문으로 내던데 반해 내가 속한 고생물 연구실은 야외 조사를 중요시 하였기 때문에 학위 논문 발표일이 되면 의례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우리 지도 교수님은 야외 조사 능력과 함께 지질학적 통찰력을 중요시 하시기 때문에 단순 시료 채취와 실험실 분석에 대해 의문을 많이 제기하셔서 다른 랩 선배들이 학위 논문 발표 시 우리 교수님은 늘 경계의 대상이셨다.

인터넷과 지질학의 접목 시도
우리 랩에서는 컴퓨터를 보조 수단으로 삼지 주력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논문을 쓴다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어느 날 늘 구독하던 美 퇴적지질학회지(SEPM)에 매년 하는 학회 소식이 실렸다. 내용을 보던 중 ‘지질학의 CD-ROM 및 인터넷 활용’이라는 포스터 세션이 눈에 띄었다.

당시 학부때 부터 관심 가지던 인터넷을 내가 하는 전공과 연계 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를 해 봤는데 그 결과를 학회에서 가서 발표하면 좋겠다는 지극히 순진한 생각을 했다. 외국 특히 미국 학회에 가서 발표를 한다는 건 우리 학과 대학원생들에게 그리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석사 1년차였던 나는 교수님과 상의도 없이 영문 초록을 만들어 이메일로 보냈다.

다행히 우리 세션은 유일하게 이메일로 포스터 좌장과 교환이 가능했던 장점이 있어서 시골 촌 구석의 대학원생의 문의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나의 연구 주제는 야외 조사에서 노두의 위치와 정보를 랩탑에 기록하고 숙소에 와서 모뎀으로 연구실 서버에 전송하는 일종의 야외 조사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에 대한 것이었고, 학부 논문을 쓸 때 만들어서 가끔 썼었다.

자바애플릿을 이용해 지도와 지질도를 미리 보고 이에 대한 위치를 mSQL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해서 저장하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나중에 학과의 이단아 처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지질학 데이터 모델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게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처럼 자원 산업을 중요시 하는 나라에서는 지질학이 매우 앞서 있으며, 석유 및 자원 탐사에 GIS는 필수 요소일 만큼 발달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순수 지질학 및 자연과학 분야에서 GIS를 연구 분야로 인정해 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석사 논문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 물론 2년 후 우여 곡절 끝에 석사 논문이 통과 되었지만, 당시에는 지금 처럼 학제간 연구가 일반화 되어 있는 분위기가 아닌 탓이다.

응모한 포스터 덜컥 선정
학부생 수준의 시스템을 요약해서 보냈는데 웬 걸 덜컥 포스터 발표가 합격되었다. 우리 세션의 총 27개 신청 중에 5개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미국 석유지질학회(AAPG)/퇴적지질학회(SEPM) 조인트 컨퍼런스는 미국 최대의 지질학회였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첫 해외 여행이자 미국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될줄 몰랐기 때문에 우선 항공료를 걱정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회사에 이야기 했더니 경비를 대 주겠다고 하셨다. 지금 한동대 교수로 가 계신 당시 보스께서 보시기에 석사 1년차가 혼자서 연구해서 발표하러 간다니 대견하셨나 보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던 데다 컴퓨터만 한다고 랩에서 퇴출 시키려고 까지 하셨던 우리 지도 교수께서도 격려를 해주셨다. 석사 1년을 보내고 2년차에 막 파트타임 대학원생이 되어 학교와 직장을 오고 가던 상태라 내가 하는 연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신 상태였다.

미국 비자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교내 여행사를 통해 1년짜리 여행 비자를 받았다. 학회 참가 등록 및 호텔 예약은 팩스와 이메일을 이용했다. 그 다음 항공권. 당시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끊는다는 게 1회 경유하는 외국 항공사였다. 델타 항공으로 75만원 정도에 부산-김포 왕복과 미국내 국내선까지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첫 여행을 가는데 비행기 갈아 타는 법도 모르면서 멋도 모르고 싸다는 이야기에 덜컥 예약을 해버렸다. 대한항공으로 부산에서 김포로 간뒤 델타항공으로 미국 포틀랜드를 경유하여 댈러스로 갔다가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다시 포틀랜드와 김포로 오는 일정이었다. 어쨌든 우여 곡절 끝에 준비를 마치고 출발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