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숨은 이야기(2) – 웹코리아 이야기

국내 최초의 인터넷에 대한 컨퍼런스였던 KRnet93에 이어, KRnet94에서 웹포럼에서 당시 텍스트 BBS에서 웹에 대한 자료를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Web BoF모임을 가지고 처음 오프라인 미팅을 하였습니다. 그 중 한글 Sendmail에 대한 국내 최초의 RFC저자인 최우형 박사가 www-forum@krnic.net 이라는 메일링리스트를 개설하게 되어 웹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메일링리스트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면서 개인들의 기술 문서가 발표되면서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했지요.

우리들만의 책을 만들다

그러던 중 ETRI의 최준혁 박사가 미국 출장길에 Mosaic과 웹에 관련된 서적을 하나 구해 왔는데, 메일링 리스트에 책을 복사(?)해서 공유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수 많은 사람들이 복사를 요청해 오는 상황이 되었죠. 포항공대 김기태 교수님의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러냐?”라는 일침에 상황이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차라리 우리들만의 필살기를 담은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 메일링 리스트에 올라오고, 책의 목차를 구성하여 자원 필자를 모으니 22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94년 12월 각자의 맡은 영역에서 책을 집필해서 취합을 하니 95년 2월에 182페이지 분량의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LaTex 포맷으로 책을 편집한 다음, 포스트스크립트(PS) 상태로 메일링리스트에 “가자 웹의 세계로”라는 이름으로 배포하게 되었지요. 책이 배포되자 반응은 아주 뜨거웠습니다.

당시 오피니언 리더로서 저자였던 몇 명이 대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각 부분을 쓴 사람만이 그 내용을 잘 아니 공부모임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메일링리스트에 이 이야기가 나오니 그러지 말고 공개 세미나를 열어보는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얼굴도 한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일을 꾸민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경험 그 자체 였기 때문에 모두 옳소 옳소 하는 분위기 였답니다.

오픈 커뮤니티, 웹코리아가 만들어 지다

이로서 95년 3월 첫번째 워크샵이 충남대학교에서 열렸습니다. 한 100여명 정도 모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해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 접속 방법, 웹브라우저 사용방법, 웹서버 설치방법 등 가장 기초적인 웹에 대한 소개와 해외 웹 개발 동향에 대한 소개 시간도 있었습니다.

당시 첫 워크샵에 참가한 사람들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고,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웹이 매우 인기있는 컴퓨팅 기술이 될 거라는 공통된 인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주최자를 비롯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95년 5월 마침내 ETRI에서 “웹코리아”라는 오픈 커뮤니티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ETRI연구원인 김용운(현, 이니텍)씨가 초대 의장(마지막 의장이기도 함)이 되고, 당시 충남대 이강찬(현, ETRI CTO), 김병학(현, 시큐리티맵 CTO), 권도균(현, KMPS CEO)씨 등이 각 분야별 워킹 그룹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후일담으로 웹코리아가 창립되던 날 저도 대전에 올라갔다가 당시 총회에 참석했던 이재웅사장(현, 다음커뮤니케이션 CEO)님 차를 얻어 타고 서울까지 동승했었습니다. 그 2시간 동안 인터넷과 웹을 통한 비지니스에 대한 이 사장님의 열정을 맛볼 수 있었는데, 그 이후로 여러번 만나 뵈었지만 이제는 국내 최대의 포털 사이트를 만들어 낸 저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W3C에 가입하다

웹코리아가 만들어지고 처음 한 일은 역시 웹 기술의 대중화를 위한 집필활동이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인터넷 잡지인 정보문화사(현, 소프트뱅크 미디어)의 “월간 인터넷”의 창간호에 웹에 대한 특집을 실었는가 하면, 각종 잡지와 미디어에 웹코리아 멤버들의 기고가 이어졌습니다. 또한, 온라인으로 배포되었던, “가자 웹의 세계로”를 수정 보완하여 오프라인 서적으로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인터넷과 웹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술 서적으로 “웹 기술 바이블”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또한, 기술을 나누는 자리인 오프라인 워크샵의 개최 역시 중요했습니다. 온라인에 공유된 정보를 오프라인에서 나누고 이들이 다시 정보를 나누는 그런 자리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에 국내 최초의 온라인 신문을 만든 “중앙일보”에서 후원하여 제2회 웹코리아 워크샵이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총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였는데, 모든 강의자가 발표 슬라이드와 함께 Full-text paper를 준비하는 등 내실 있는 워크샵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국내에 해외 선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당시 MIT, INRIA, 게이오 대학이 주축이 된 표준화 기구인 웹컨소시엄(W3C)에 한국 전산원에 도움에 의해 가입되어 국내 최초로 W3C 한국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밑거름이 되어 드디어 2002년 ETRI에 W3C 한국 공식 사무소(http://www.w3c.or.kr)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워킹 그룹과 오프라인 워크샵이 이어지다

모임이 결성되자 마자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서울, 부산, 대구 등 각 지역 워킹 그룹이 결성되고 자체 세미나 등의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각 지역 모임에서 공식 워크샵을 일년에 두차례에 걸쳐 열게 되었습니다. 제3회 워크샵 (부산대, 1996.3)에 700여명이 참가했고 제4회 워크샵 (광운대, 1996.11)에는 600여명, 제5회 워크샵 (경북대, 1997.5)에는 800여명이 참가하는 국내 최대의 웹기술 워크샵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150여개의 주제에 100여명의 강사가 발표자료와 Full-text paper를 준비해 배포하는 가장 양질의 워크샵 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도는 우리땅, 전자지불, 보안 등 다양한 주제의 워킹 그룹들이 활동하였고 이에 대한 관심이 비지니스로 이어지는 등 국내 인터넷 비지니스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98년에 들어서자 국내 인터넷과 웹이 산업화의 물결을 타게 되고 수많은 웹사이트와 관련 서적, 그리고 업체가 봇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웹코리아의 코아 멤버들을 비롯하여 대부분 사람들이 인터넷 업체에서 산업화를 위해 뛰게 됨에 따라 웹코리아는 내부적인 기술 토론 그룹으로 남게 되어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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