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과 저녁이 있는 삶

한국에서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 그건 “가족을 위해 가족을 포기하는 삶”이라는 역설적인 문구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조성문님의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 가족 중심 문화의 중요성” 이라는 글을 보면, 미국에서의 일보다 가족 중심 그리고 개인의 삶의 행복을 중시하는 풍토는 매우 감동적이죠.

하지만, 미국에도 물론 워크홀릭이 있고 뉴욕같은 대도시의 삶은 서울과 다를 바 없이 바쁘고, 그에 반해 한국에서도 가족 중심의 삶을 사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만날 안 좋은 것만 이야기하고 듣다 보니 한국 땅이 다 그런것 같다는 집단 체면에 빠지는 것을 수도… 제가 보기엔 개인차가 많고, 회사에 따라 충분히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극단적인 저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고 살아오면서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이 만들어졌습니다.

첫번째 원칙은 회사와 집의 거리가 버스로나 걸어서나 20분이내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첫 직장의 사무실이 청담동이나 역삼동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근처에 집을 얻었습니다. 집이 조금 낡고 작아도 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아이들을 보고, 밤에 회사로 다시 오고 그랬습니다. 점심도 자주 집에가서 먹고 왔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짜투리 시간을 가족과 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집에 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는 것인데, 이직 후 제주로 오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더군요. 셔틀 버스 출퇴근을 하면서 9시반 출근 6시반 퇴근이 꼭 지켜졌습니다.

두번째 원칙은 자동차를 사지 않은 것입니다.
일이 있던 없든 셔틀 시간이 되면 바로 퇴근합니다. 7시에 집에 오면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낸 뒤 늘 9시면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물론 밤 12시나 새벽 1시쯤 깨어 못다한 업무나 글쓰기, 오픈 소스 활동 등을 합니다.)

규칙적인 삶을 살게 되더군요. 제주에서 차없이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봅니다. 익숙해지고 즐기면 불편하지 않습니다. 어디 놀러 가더라도 아이들과 버스를 탑니다. 대화시간도 친밀도도 늘어 납니다.

시간표에 맞추어 여유있고, 계획적인 여행이 가능합니다. 덕분에 우리 아들은 제주의 모든 버스 노선과 시간표를 꿰고 있습니다. 3학년 때 혼자서 제주시 전역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 원칙은 아이들에게 아빠의 삶을 모두 오픈합니다.
아이들을 회사에 자주 데려 갑니다. 우리 첫 애 백일과 돌잔치는 회사에서 했습니다. 첫 회사에서 워크샵에도 가족을 함께 데려갔습니다. 직원들이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도 상관 없습니다. 제가 보스였으니까 ㅎㅎ

주말에 회사에서 일할 필요가 있으면, 아이들이 늘 함께였죠. 제주에 와서도 방학때는 가끔 회사에 와서 놉니다. 회사에서 텐트치고 야영을 하기도 합니다. 팀원 숫자가 적을 때는 회식도 가족 동반으로 했습니다. 요즘은 애들이 커서 술 먹는 걸 배우는 것 같아 이제 안 데리고 갑니다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직장에서 삶이 낯설지 않습니다.

네번째 원칙은 2년에 한번은 꼭 장기 여행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미국에 2주 정도 출장 겸 여행을 떠난적이 있습니다. 오로지 엄마 아빠하고만 24시간 함께 지내는 동안 아이들과 친밀감이 높아지면서 부쩍 크는 걸 느꼈습니다. 그 뒤로는 아이들과 여행 꼭 가려고 합니다. 일본,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홍콩, 싱가폴, 미국 동부, 미국 서부를 함께 갔습니다. 결혼 10주년때 애들을 처가에 떼놓고 와이프랑 여행 갔다가 아직도 원망 듣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은 제주에 살다보니 도시에만 있는 지하철을 좋아합니다. 서울가면 꼭 전 노선을 타고 싶어하죠. 그래서, 재작년에는 국내 지하철 노선 전체를 타보는 국내 여행을 3박 4일로 아들과 저만 다녀왔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원하는대로 노선만 바꿔타고 책 읽고 이야기하고… 해외 여행을 가도 꼭 지하철을 태워 줍니다. 그래서 이 녀석은 웬만한 글로벌 도시의 지하철은 다 타봤습니다.

다섯번째 원칙은 아이들과 기억에 남을 반복적 즐거움을 만드는 겁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연간 회원권 끊고 롯데월드에 자주 갔습니다. 2년 간 주일마다 스파게띠아에서 밥을 먹었구요. 제주에서는 여름엔 해수욕장에 물놀이를, 겨울엔 눈썰매 타기를 하지요.

요즘은 캠핑을 좋아해서 날씨가 맑은 날엔 야영을 하러 갑니다. 뭐 엄청난 장비 없습니다. 그냥 던지면 펴지는 원터치 텐트 하나랑 침낭에 베개 들고 버스타고 이호나 함덕 해변 갑니다. 저녁 먹고 가서, 잠만 자고 아침에 일찍 집에와서 씻지요. 맥도날드 햄버거를 좋아해서 주일마다 함께 먹고, 가까운 CGV에 팝콘 사러 자주 갑니다. 그냥 갔다왔다 즐기는 거에요. 그렇게 시간을 공유하면서 추억이 쌓이고 이야기할거리가 늘어납니다.

사진이나 동영상도 많이 찍어서 500G HDD에 백업되어 있는데 가끔 열어봅니다. 와이프는 여행다녀온 뒤 아예 사진첩을 책으로 묶어 냅니다. 책장에 꼽혀 있어 언제든지 추억을 꺼내 봅니다.
심각하게 고민해 봅시다.

사람들 야근 많다고 하는데 정말 일이 많아서 남는 건지, 지금 가도 어차피 늦게 가니까 그냥 좀 더 일하고 가는건지… 전 개발자로 일할 때나 지금도 밤에 집에서 일합니다. 셔틀 버스 시간 되면 쓰던 메일도 그냥 그대로 두고 얄짤없이 일어납니다.

요즘엔 스마트폰에 웹 브라우저 동기화도 잘되어 있고, VPN도 빠르고 게다가 클라우드 서비스 까지 있어서 회사와 집에서 업무 동기화가 바로 됩니다. 아예 집에 회사 랩탑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이글도 새벽 3시에 쓰고 8시 20분에 bufferapp으로 보내는 겁니다.)

와이프가 집에까지 일을 가지고 오냐고 뭐라 하지 않냐구요?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요 ㅎㅎ

전 지금까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술담배를 한번도 입에 대어 본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사회 생활하면서 그게 가능하냐구요? 가능합니다. 안해봤음 말을 하지 마세요. 승진 기회 조금 포기하고, 연봉 좀 더 받기 위한 이직 기회 조금 포기하면 가능합니다. 제 스스로 이게 가능한 문화를 가진 회사를 만들거나 찾았습니다. (그래봐야 고작 2개입니다. 하나는 7년을 다녔고 지금은 10년째입니다. 운이 좋았죠.)

그 동안 가족들 옆에 있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오히려 회사의 골치거리를 해결하기에 골몰하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일도 찾고 취미로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여유도 얻었습니다.

20대에 회사를 경영하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조직의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기 싫은 뒤치닥거리와 해결하기 힘든 골치거리만 늘어간다는것을… 빨리 올라가면 언제나 빨리 내려온다는 것을. 30대에 저를 여유롭게 만들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저의 20대는 정말 워크홀릭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배우고 만들고 달렸죠. 하지만 30대의 삶은 가족이 중요했습니다. 아마 다시 워크홀릭이 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우리 애들이 스스로 독립할 그 때가 아닐까 싶네요. 40대에 접어들어 돌아보니 저에게 삶의 여유와 의미를 가르쳐준 우리 아이들에게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아이들 학교에서 라이드(데려와야) 한다고 오후 3시 회의시간에 일어서는 직원들 보고 놀랬다는데… 그거 당연한 겁니다. 거기선 아이들 혼자서 등하교를 못하는 법이 있으니까요. 그 사회의 당연한 규칙 같은것이지 놀랄 일이 아니에요. 삶은 어디나 똑같습니다. 어떻게 행복을 찾느냐에 달려있지… 미국 간다고 행복해 지는 거 아니에요.

저의 이야기가 좀 극단적일 수는 있습니다만…

여러분도 조금씩 작은 행복을 찾아보세요.
사회가, 학교가, 아니 회사가 만들어주지 않으니까요.


p.s
제 삶의 선택에 대한 상세 내용을 곁들이지 않았더니 대다수가 환경(돈이나 회사, 직책)이 되어야 가능한 것들이 많다고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회사 근처 집 얻기: 99년 무렵 회사가 학동사거리에 있었는데, 논현동 블럭쪽에 오래된 빌라촌이 있었습니다. 좁은 거실과 방 2개에 전세 4천 그것도 대출 반을 끼고 살았구요. 그 뒤로 반포동 지금 교보생명사거리 뒷쪽 빌라촌에 살았는데, 둘다 비가 새고, 곰팡이가 끼는 그런 낡은 집들이었어요. 집세도 올려달래서 거의 1년반마다 이사를 네번이나 했죠. 그래도 늘 가까이에 가족이 있어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집들이 강남 한복판에 있다보니 매연이나 공기가 나빠서 아이들에게 나쁜 해를 끼치지 않았었나 하는 점이에요. 대부분 와이프들이 기꺼이 주거라는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집을 잘 찾지 않습니다. 그런점에서 와이프에게 늘 고마워합니다. 그나마 집다운 집을 얻게된 건 2006년에 제주 이주 후인데, 회사와 집이 가까우면서 (서울과 같은 비용에) 좋은 집에 살게 된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2년에 한번씩 장기 여행 가기: 네 식구가 여행을 한번 가려면 거의 기천만원이 듭니다. 제가 무슨 떼돈 번 부자도 아니고 월급으로 조금씩 모아둔 돈 다 때려 박아야 가능합니다. 사실 집이나 자동차 아니면 술 담배의 유혹을 다 벗어버리면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무슨 스님이나 신부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냐?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냥 가능하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물론 이것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들 삶의 목표가 있고 그걸 위해 다른 것을 또 희생하고 계시니까요. 다만,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 노후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건 맞지 않다.. 삶의 각 시기에 꼭 필요한 걸 하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회사에 높은 위치에 있어서?: 운이 좋게도 첫 직장에서 평사원에서 회사 경영까지 오르는 짜릿한 경험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20대가 주로 모인 젊은 벤처기업이었기 때문에 상하 관계가 별로 심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서로 님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수평 문화 기업이기도 하고, 큰 기업이긴 해도 저의 팀은 두명에서 시작해서 이제 5명이 된 작은 팀입니다. 대기업으로 혹은 좀 더 빡빡한 기업으로 또는 더 높은 직책으로 이직 기회가 많았습니다만 20대의 좌충우돌 경험이 저를 돌아보고, 좀 더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글쎄요! 자아 실현이 좀 더 높은 연봉, 좀 더 높은 직책, 좀 더 좋은 회사에 근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에게는 안맞는 일일 수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도 회사에서 좀 더 낮은 곳을 찾을 수록 저의 정체성이 분명해지고,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얻을 수 있더군요. 이것도 결국 선택의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결과는 다양합니다. 제가 한 선택 중에는 희생이 따르는 게 더 많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술 안 먹는 사람에게 큰 조직을 맡기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왜 차가 없냐고 묻는 아들에게도 답변은 궁색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는 것이죠. 저의 약간 극단적인 선택(?)에도 양면성이 존재하니, 여러분의 선택 뒤 반대편의 감사한 것들도 찾아보시길…

출처: https://medium.com/p/2b432956fc7d

여러분의 생각

  1. 때마침 좋은 글을 읽게되었네요… 감사합니다.

  2. 살의 철학 공유 감사합니다

  3. 석찬님께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저도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버리지 못해 끙끙대던 것들이 막상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군요.

  4. 네. 멋진 정리 감사합니다. 교수님~

  5.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잘 지내시죠?

  6. 서울에서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

  7.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가는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간접적으로 보고갑니다.
    좋은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8. 20대에서 30대가 되고, 개발자로 직장생활하며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제 현실에 무척 와닿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9. 좋은 글 감사합니다.^^

  10. 이 글 전에도 읽은 적이 있는데 진정한 아버지 이십니다.

  11. Channy Yun 님은 운이 좋으셨다고 생각되지만-
    부모가 모두 직장인인 경우에도 아이들을 위해 같은 선택/환경이 가능했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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